2일 저녁에 선운사 근처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으려고 하니 펜션 등 간판에 "방이없슴니다"라는 표시가 붙어있다.

아차 황금연휴라서 그렇쿠나 ~  난감해 하는데 그래도 집사람이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방이 없다는 대답을 하는데
애처롭게 어디 방 구할 수 없냐고 물어본다. 목소리에서 난감함이 묻어있는지 일흔이 넘은 펜션 할아버지가
아들내외가 내려와서 묵을 방을 우리에게 선뜻 내어준다. 데리로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차들이 빈방을 찾는지 연신
간판앞에 머물러 있다가 자리를 뜨곤 한다. 펜션으로 가서 방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주인할아버지에게 연신 빈방있는지 물어보는 전화가 걸려온다.

우와~~~~ 재수 좋다.
작년부터 가족여행을 떠나면 숙소 예약 안하고 대충의 일정을 잡고 밤되면 근처 민박, 호텔, 펜션 안가리고 자곤 했는데
이런 연휴에는 숙소부터 해결을 하고 여행을 떠나야 겠구나.
그나저나 집사람 덕분에 잠자리까지 해결하고 방에 짐을 놓고는 전북 고창의 명물인  풍천장어와 선운산 복분자주를 마시러 슬슬 걸어나가서
얼굴이 불콰해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게 여행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풍천장어란게 풍천이 지명이 아니고 바람풍 내천으로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지역을 의미하며 고창 구암리쪽을 뜻한다고 한다.

아침일찍 눈을 뜨고는 선운사를 구경하기로...



선운사 일주문

선운사: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린 날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감동하여 절을 세웠다는 설과, 그보다 2년 늦은 55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 또는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354년에 효정(孝正)이 중수하고, 1472년부터 10여 년 동안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고 하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는데, 1613년 재건을 시작하여 1619년 완성했으며, 그뒤 근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보물 제290호)·영산전(靈山殿)·명부전·만세루(萬歲樓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산신각·천왕문·대방(大房)·요사(寮舍) 등이 있다. 절에 전하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동불암마애불상(보물 제1200호)·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과 중종과 부도 및 탑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밖에 다수의 조상(彫像)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부속암자는 현재 4곳만 남아 있지만 19세기 전반에는 50여 개나 되었으며, 절 주위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龍門窟), 전망이 뛰어난 만월대(滿月臺),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2s0319b)







선운사로 걸어가는 길 좌측으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데 길과 계곡을 나무가 뒤 덮고 있는데
햇살받은 연한 녹색이 물에 비치는데 장관이다. 신록의 녹색도 너무나 이쁘고 먼지없는 깨끗한 공기도 좋고...









아기손 같은 단풍나무의 잎도 신록을 자락하고 있다.
단풍나무면 가을에 단풍이 들어야지 아름다울듯 햇으나 연한 녹색의 단풍잎도 이렇게 색이 고운지는 몰랐는데...




어제 밤이나 이른 아침에 비가 왔었는지 공기도 깨끗하고 먼지도 없이 투명한 산사의 아침이 이렇게 미치도록 아름다운지 몰랐었다.








잔잔한 물에 비친 녹색...








햇살을 머금어서 투명한 녹색의 잎들...




천왕문을 지나 선운사로 들어선다.




만세루, 승려들 강의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어제가 사월초파일이다 보니 아직 연등이 마당에 걸려있고...



















사찰내에 빨간 철죽이 피어서 화려함을 뽐내고...











영산전 내의 탱화
















산신각


팔상전


영산전





목어


사찰과 도솔산 (선운산)과 어울려 멋진 조화를...

































지칠때는 쉬어서 간들 어떠하리...












2009년 5월 3일 (일)
Posted by 홍콩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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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雲柱寺) 運舟寺라고도 한다. 이 절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內實)을 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주사와 도선과의 연관은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비보사상을 바탕으로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승 혜명(惠明)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을 970(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1495(연산군 1)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변에 91구의 석불(완형 50) 21기의 석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보물 제797)·9층석탑(보물 제796)·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이다
(출처: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3864b)



나주에서 약 1시간정도 걸려서 화순 운주사에 도착하였다.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던 사찰이라서 "천불천탑 운주사" 불리운다고 한다. 일주문에도 천불천탑도량이라고 되어있다.
원래는 마당장자이나 도량이라고 읽는다.

마침 오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니 사찰이 복잡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착하니 운주산문화제도 하고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조용한 사찰이 운치가 있겠지만 시간이 안돼니...

운주사는 퇴마록 혼세편에서도 언급이 된 사찰이라고 한다. 운주사의 누워있는 와불이 일어나는날 세상이 바뀐다고 한다는데...
아쉽게도 와불까지는 못 가보고 대웅전과 사찰 근처에서만...






들어가는 입구옆에서는 문화제 행사를 하고 있다.



여기저기에 석조불상이 보인다.



그냥 산등성이에도 탑과 투박하고 소박해 보이는 불상이 높여져 있다.




불상 자체는 정교함과는 좀 거리가 먼 듯하다. 비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선이 명확하지도 않지만 둥굴 둥굴한게 정이 가는 모습이다.
먼지하나 없는 절간안에 근엄하고 위압적인 카리스마있는 불상이 아니고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을 지닌 불상이다.

어느정도 사찰로 걸어가다가 집사람과 아들은 피곤하다고 자동차로 돌아가서 쉰다고 돌아가고 나 혼자...






보물 제796호. 높이 10.7m. 이 석탑은 운주사 석탑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고 높은 것으로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3, 4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조각하고 그 위에 바로 탑신이 놓여 있는 형식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생략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1층 옥신은 6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그 안쪽으로 보조우주가 새겨져 있다. 2, 3, 4층의 옥신은 1층 옥신과는 달리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그 사이로 2중의 마름모꼴 안에 4엽화무늬[四葉花紋]가 장식된 문양이 새겨져 있다. 5층 이상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문양은 마름모꼴 안에 꽃무늬가 있는 경우와 十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있다. 옥개석에는 층급받침 대신 선무늬[線紋]로 형태를 조각했으며 낙수면은 편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 끝부분에서 살짝 위로 올라가 있다. 상륜부에는 원주형의 석재와 보륜(寶輪) 등이 놓여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비례감을 보여주며 탑신부의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옥개석의 끝부분이 약간 반전된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3864b001)


사찰로 올라가는길 옆으로 불상이 쭉~~














칠층석탑. 원래는 논가운데 있었는데 운주사에서 주변 논을 매입해서 잔디를 심고 정비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탑이다고 한다.


쌍교차문 칠층석탑. 탑 외형은 신라시대 양식을 따르는데 특이하게 XX와 마름모로 장식을 하였다.
























석조불감 앞에 있는  고려시대 탑이다.







석조불감

운주사 야외불당의 주존불구실을 하고있다. 불감은 팔짝형태의 지붕을 갖추고 그위에 용마루등이 조각되어있는 목조건축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감실내부에는 불상2구가 등을 맞댄형태로 배치되어있다.










원형다층석탑. 고려시대 탑이라고 하는데 특이하다. 이렇게 원형탑은 첨 보는것 같다.








대웅전









단청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대웅전 뒤쪽에도 크고 작은 탑과 불상이 있다.
























마애여래좌상
바위에 음각, 양각으로 세겨진 여래좌상인데 비바람에 시달렸는지 무딘눈으로 보니 얼굴부분만 겨우 알아볼수 있고 다른부분은 구별이 영 쉽지가 않다.







산신각앞에 철쭉이 활짝피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지장전 옆모습





대웅전 옆에서 공양시간은 지났지만 초파일날이라고 비빔밥을 한그릇 받아들고 고추장 한 숫가락 담아서 한옆으로 물러나서 썩썩 비벼먹으니 꿀맛이다. 
먹고 있는데 아들이 전화를 한다...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리니 둘이 차에만 앉아있기에 지루했으리라..ㅋㅋ
비빔밥 공양을 한다고 하니 올라 온다고 해서 비빔밥으로 점심겸 저녁을 때우고...






이제는 아들도 대웅전에 들어가서 절하는 집사람 옆에서 폼은 엉성하지만 꾸벅 꾸벅 절을 하고는 한다.
대웅전에서 시주도 하고 나와서는 기와불사를 하는데 시주도 한다. 작은액수지만 시주를 해서 집사람 맘이 편하다면 그걸로 위안받을 수 있으니... 



















내려오다 운주산문화축제장에서 공연도 보고 나서 시간이 늦어가므로 고창으로가서 잠자리를 찾기로...



2009년 5월 2일 (토)
Posted by 홍콩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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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5월초 연휴를 맞이해서 가족여행을 갈 곳을 찾다가 늦봄이지만 나주 영산강변에 유채꽃이 아직도 피었다고 하길래
나주 영산강으로 갔다가 화순, 고창, 부안 변산반도를 돌기로 계획하였다.

근로자의 날 부터 쉬지만 마침 아들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였기 때문에 5월 2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빡세게...
연휴다 보니 아침에 막힐것을 예상해서 새벽에 출발하기로...

좀 늦은 새벽인 4시 30분에 집을나서 나주로 출발~~~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시 잠을 자고 떠나도 도착하니 9시 조금 넘은시간...
그런데 유채꽃이 많이 지고 푸른색이 많이 보인다. ㅠㅠ









영산강 다리너머 영산포에는 홍어의 거리가 있어서 맛난 홍어를 먹을 수 있겠다.




한쪽 강변에는 그나마 유채꽃의 노란색이 진하다.

나주곰탕을 먹으로 매일시장으로...
하얀집, 남평식당과 또하나 식당이 있는데 약간 더 허름해 보이는 남평식당에서 나주곰탕을 맛나게
설렁탕이 흰국물이라면 곰탕은 맑은 국물이다.
아들도 아내도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하고 주변을 돌아보기로...


주차장 앞에 있는 2층 아문인 정수루




나주 목사내아. "목"이란건 옛날 지방행정 단위로 이를 다스리는 관리가 목사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거주했던 살림집이라고 한다.
숙박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예약이 필수인듯... 5월달은 다 예약이 차있다고 하니...




나주목이 생긴 이래 1000년. 그 오랜 세월 동안 유일하게 목사로 두 번 부임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 광해군 때의 유석증이다. 나주목사에서 물러나 암행어사로 부임했던 그는 9년 만에 다시 나주목사로 내려온다. 나주 백성들의 로비 때문이다. 첫 부임 때 유석증의 선정을 잊지 못한 백성들은 상소를 올려 ‘그를 다시 내려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백성들은 십시일반으로 거둔 쌀 300석을 바치기까지 했다.

유석증이 재부임하자 이번에는 유임운동이 벌어졌다. 나주 사람들은 “유 목사를 나주에 계속 있게 해 달라”며 상소를 올리고 거둬 모은 쌀 2000석을 바쳤다. 유석증의 임기 동안 매년 유임운동이 벌어졌을 정도로 그에 대한 나주 백성들의 사랑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사정을 담은 광해군 일기의 한 대목을 들춰보자. “수령을 제수하는데, 모두 뇌물을 받았기에 서로 박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유석증은 청백하고 근신하여 잘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러한 청을 한 것인데, 백성의 마음 또한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42201032330024004, 문화일보)









목사내아를 나와서 나주향교로 갔으나 내부는 공사중이라서 제대로 볼 수가없었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나주 향교는 서울문묘·강릉향고·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이다

나주에도 멋진 메타세콰이어길이 있으나 사진보다는 가족들 구경이 먼저니 다음 목적지인 나주 영상테마파크로 출발...
Posted by 홍콩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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